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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쯤이면 서점 베스트셀러 매대에 같은 책이 올라옵니다. 트렌드 코리아. 김난도 교수와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다음 해의 소비·문화·산업 흐름을 10개 키워드로 정리하는 작업을 2008년부터 해오고 있고, 이제는 한국 사회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정기 검진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이 책을 읽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마케터는 다음 분기 캠페인의 단서를 찾고, 기획자는 신규 제품의 컨셉을 점검하며, 일반 독자는 "내가 느끼던 그 변화에 이름이 붙어 있구나"를 확인합니다. 트렌드 예측이 정확한지 여부보다, 지금 이 시점에 한국 사회가 자신을 설명하려고 골라낸 단어들이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더 의미 있을 때가 많습니다.
2026년판이 다른 해와 구별되는 지점은 분명합니다. 생성형 AI가 더 이상 트렌드의 배경이 아니라 전경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10개 키워드 중 휴먼인더루프, AX조직, 제로클릭은 직접적으로 AI를 다루고, 필노코미·레디코어·픽셀라이프는 "AI가 일상화된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리를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래서 1장의 2025년 회고를 함께 읽으면, 작년의 신호들이 어떻게 올해의 키워드로 이어졌는지를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됩니다.
옴니보어(Omnivore)는 사전적으로는 잡식성이라는 뜻이지만, 사회학에서는 특정 문화에 얽매이지 않고 폭넓은 취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한 사람이 클래식 공연을 보고 와서 같은 주에 트로트 콘서트를 가고, 명품 가방과 다이소 제품을 한 카트에 담는 것이 더 이상 모순이 아닌 시대입니다.
이 변화의 핵심은 취향이 신분의 표지에서 자기표현의 도구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어떤 음악을 듣느냐"가 그 사람의 계층과 교양 수준을 드러냈지만, 지금은 같은 사람이 상황과 기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취향 사이를 이동합니다. 알고리즘이 추천한 콘텐츠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장르 간 경계를 허문 콜라보레이션을 자연스럽게 소비합니다.
마케팅 관점에서 옴니보어 시대는 도전적입니다. 고전적 STP 전략(시장세분화·타겟팅·포지셔닝)이 가정하는 "한 명의 소비자는 일관된 취향을 가진다"는 전제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람이 평일 점심엔 1만 원짜리 김밥을, 주말 저녁엔 30만 원짜리 오마카세를 먹는 것이 동일한 정체성의 두 표현일 수 있습니다.
공진화(Coevolution)는 원래 생물학 용어입니다. 서로 다른 종이 상호작용하며 함께 진화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책은 이 개념을 협업의 새로운 모델로 끌어옵니다. 단순한 콜라보가 아니라, 두 브랜드가 서로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며 함께 변해가는 형태입니다.
대표 사례로 거론된 것이 현대자동차와 GM의 협업, 스타벅스와 광장시장의 만남, 유니클로와 제주의 결합입니다. 이들 사례의 공통점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양쪽 모두의 브랜드 자산이 재해석되었다는 점입니다. 광장시장은 스타벅스의 글로벌 디자인 언어를 빌려 와 자신을 다시 보여주었고, 스타벅스는 광장시장의 로컬리티를 자신의 메뉴와 공간에 흡수했습니다.
페이스테크(Face Tech)는 얼굴이 가진 정보를 기술적으로 활용하는 트렌드입니다. 인천공항 출국장의 얼굴 인식 게이트가 가장 일상적인 사례로, 여권을 꺼낼 필요 없이 얼굴만으로 신원이 확인됩니다. 더 넓게는 표정 인식과 감정 분석이 콘텐츠 추천, 광고 효과 측정, 헬스케어 앱 등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 기술은 동시에 프라이버시 논쟁의 최전선이기도 합니다. 얼굴은 비밀번호와 달리 변경할 수 없는 식별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흐름은 작년 한 해 가장 많은 신조어를 만들어낸 영역입니다.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 원포인트업, 런트립, 텍스트힙, 독파민, 오독완 같은 표현들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거대한 행복 대신 작은 안정을 추구합니다. 방송인 홍진경이 말한 "행복은 자려고 누웠을 때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없는 것"이라는 정의가 이 흐름의 정서를 잘 보여줍니다. 너무 행복하지도, 너무 불행하지도 않은 평범한 하루(아보하)가 추구의 대상이 됩니다.
둘째, 자기계발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습니다. 원포인트업은 "지금 도달 가능한 한 가지 목표를 세워 실천하면서, 나다움을 잃지 않는 자기계발"입니다. 과거의 자기계발이 "더 나은 나로의 도약"이었다면, 원포인트업은 "지금의 나에 한 칸 더하기"에 가깝습니다. 어학앱 스픽·말해보카, 홈트앱 콰트, 루틴 셀프케어 앱 루빗의 사용자가 늘어난 것이 이 흐름의 실증입니다.
번아웃 시대의 극복법으로 부상한 것이 몰입을 통한 회복입니다. 거창한 휴식이 아니라, 무언가에 푹 빠지는 시간을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찾는 방식입니다.
대표적인 표현이 별다꾸(별걸 다 꾸민다)입니다. 폰케이스, 다이어리, 텀블러, 키보드, 자동차 키링까지 일상의 모든 사물을 자기 취향으로 꾸미는 행위가 번아웃 시대의 작은 통제감을 회복시켜 줍니다. 통제할 수 없는 일상에서 통제할 수 있는 작은 영역을 만드는 것입니다. 스포츠 활동, 특히 러닝과 클라이밍 인구의 증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후감수성은 기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태도와 능력을 가리킵니다. 단순한 환경 감수성과는 결이 다릅니다. 기후가 일상의 의사결정 변수로 들어왔다는 의미입니다.
폭염이 길어지면 패션과 유통의 기획 시점이 바뀝니다. 봄옷의 판매 기간이 짧아지고, 간절기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해도 있습니다. 식료품 유통은 폭염에 약한 채소·과일의 대체 재배지를 찾고, 에어컨·선풍기는 7월이 아니라 5월에 피크를 맞습니다. 보험 상품과 부동산 입지(지하 침수, 일사량 등)에도 기후 변수가 반영됩니다. 이는 ESG 같은 거대 담론이 아니라, 매장 진열대와 마트 구매 리스트 단위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2025년 다섯 가지 흐름을 한 줄로 묶으면 이렇습니다. 취향은 흩어지고(옴니보어), 협업은 깊어지며(공진화·페이스테크), 행복은 작아지고(아보하·원포인트업), 회복은 일상화되며(별다꾸), 기후는 의사결정 변수가 된다(기후감수성).
2025년의 흐름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 분모가 보입니다.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취향의 일관성도, 브랜드의 경계도, 행복의 기준도, 계절의 경계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 불확실성 위에 2026년에는 한 가지 변수가 더 얹힙니다. 생성형 AI가 일상에 본격적으로 들어옵니다.
다음 장부터 살펴볼 10개 키워드는 이 두 가지 — 불확실성과 AI — 의 교차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AI를 어떻게 쓸 것인가(휴먼인더루프, AX조직, 제로클릭), 불확실성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필노코미, 레디코어, 픽셀라이프),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프라이스 디코딩, 건강지능 HQ, 1.5 가구, 근본이즘). 2026의 트렌드 지도는 결국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응답입니다.
다음 2장에서는 그 첫 번째 키워드, 휴먼인더루프(Human-in-the-Loop)부터 살펴봅니다. AI가 일을 하고 인간이 한 번은 개입한다는 이 단순해 보이는 명제가, 실은 AI 시대의 가장 정치적이고 가장 실용적인 합의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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